있는 그대로가 좋아
그해 겨울 본문
문학과지성 시인선 393
오늘 아침 단어 시인 유희경
3
부
그해 겨울 / 유희경
그해 겨울 오랜 연애를 마감하였고 파란 사파리 점
퍼를 사서 계절이 다 닳도록 입었다 즐겨 들었던 노
래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몇 갑의 담배를 피웠고 끊
을 수가 없었다 떨지 않았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던
그해 겨울,
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따금 전광판을 바라봤지만
나는 소식이 되지 않았다 이따금 生은 괜찮았다 이따
금 새가 날았다 이따금 아는 사람을 만났고 명함을
주고받았다 어디든 나는 나이를 둘러매고 갔다 췌장
을 앓았다 받아온 약은 먹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한 해
가 지나가고 있었다
나무들은 멈추었다 겨울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쓰
지 못했다 다 필요 없어 보이기만 했으니, 만져보았
던 글자들이 몸을 떨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
있었다 늙은 개들은 언덕을 따라 올라가고 아이들은
여전히 달리기를 잘했다
그리고 그해 겨울 내가 주운 종이는 구겨져 있었다
그 종이에 쓰인 것들 흔들리다가 쏟아져 모두 그해
겨울이었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했다 그는 더 이
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질문
뿐이었다 한 손을 번쩍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러
나 아무도 없었다
겨울은 언제나 다음에 찾아올 겨울을 기약하였다
영원한 작별은 불가능하거나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죽
어가고 있었다 구원은 도처에 있었으나 아무도 줍지
않았다 많은 문장으로 일기를 썼고 그보다 더 많은
문장을 지워갔다 여전히 그만둘 수 없었다 이토록 질
긴 것들이 무엇인지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
를 들여다보지 않았으므로
과연 우리는 마땅한 것일까 자꾸 손을 숨겼고 그렇
게 숨고 싶어 하는 손을 나는 늘 경계하였으나 손은
아무런 죄도 없었다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져갈 때 나
는 그들의 이름을 생각하고 우리는 이제 그럴 나이가
되었다고 생각했다
무언가, 나를 감아올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자주
잠이 들었고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던 밤도 있
었다 그해 겨울 나는 그해 겨울을 포기하였고 동시에
모든 그해 겨울을 보고 싶기도 하였다 나는 안전하였
다 그게 나를 무섭게 만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
다 나는 잠들 수가 없었다 그해 겨울 나는 불어왔다
불어갔다 너무 멀리 날아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
page 80~83 페이지
2019年 05月16日(木曜日)