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있는 그대로가 좋아

문학과지성 시인선 456 밥의 입국 심사 시인 김경미 3부 김밥의 세계 / 김경미 이곳은 어디인가 누구의 방이거나 집인지 모르겠다 어두운 게 극장 같지만 극장은 아니다 밤인데 전등을 켜지 않았을 뿐이다 켜지 못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인기척을 내지 않으며 나는 차가운 김밥을 먹는 중이다 처음에는 침대에 걸터앉아 숨죽여 먹었다 방문 밖 정원의 파티 때문이다 방문은 종잇장처럼 얇고 그 문만 열면 정원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흰색 테이블과 제라늄꽃 장식들 케이크와 포도주 잔이 가득하다 그곳은 초대받은 이들의 세계다 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초대받은 이들과는 안면이 있다 창문턱으로 간다 그곳은 달빛이라도 있어서 검은 김밥이 좀더 잘 보인다 어제 사다 둔 김밥이다 바짝 마른 김밥에 혀가 자꾸 말린다 머리카락도 괜히 말린..

어둠의 생김새 / 김경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456 밥의 입국 심사 시인 김경미 3부 어둠의 생김새 / 김경미 모든 육체는 어둠을 주조한 것 어둠의 두께와 생김새가 그를 결정한다 어둠의 콧날이 두툼하면 분꽃은 나팔꽃이 되고 어둠의 목이 길어지면 뱀은 기린이 되는 것 팔을 잡아당긴 어둠은 주전자가 되고 어둠의 속을 파내면 신발이 된다 그러므로 목숨이란 어둠의 윤곽을 무너뜨리지 않 는 것 죽음이 윤곽을 열 때까지 몸은 끝내 제 몸 바깥에서의 풍찬 노숙 꽃잎들은 얇고 납작한 어둠의 부피로 더 얇은 바람을 이기니 어둠이 적을수록 형체를 얻지 못하는 법 그리하여 밤 밀물지기 전 석양을 사랑하듯 어둠의 숙명을 많이 아는 자일수록 나 사랑하는 것 거울 속 저편의 어두운 나신(裸身)처럼 page 154~155 2019年..

초승달 / 김경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456 밥의 입국 심사 시인 김경미 3부 초승달 / 김경미 얇고 긴 입술 하나로 온 밤하늘을 다 물고 가는 물고기 한 마리 외뿔 하나에 온몸 다 끌려가는 검은 코뿔소 한 마리 가다가 잠시 멈춰선 검정고양이 입에 물린 생선처럼 파닥이는, 은색 나뭇잎 한 장 검정 그물코마다 귀 잡힌 별빛들 나도 당신이라는 깜깜한 세계를 그렇게 다 물어 가고 싶다 page140~141 2019年 04月12日(金曜日) 암연 / 고한우

나무와 신(神) / 김경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456 밥의 입국 심사 시인 김경미 3부 나무와 신(神) / 김경미 그녀가 종교에 미쳤다고 다들 귀뜀했다 걱정 없다 내 머릿속에는 커튼 고리와 라오스와 슬로바키아, 목련과 자운영 카유보트와 오만과 눈가를 적시는 까닭 모를, 따위들뿐 건성으로 찻집에 마주 앉았는데 바깥 언덕에 세워둔 차가 혼자 뒷걸음질을 시작 했다 꽝! 하고 친구는 어느 날 밤 자다가 백만 볼트 전류를 들이받고 물 젖은 감전사 직전에 신이 보낸 시험인지 신 때문에 물리친 은총인지 살아났다는데 길가의 가로수가 막지 않았으면 차는 급커브 4차선 도로까지 밀려 나가 대형 참사를 넀 을 텐데 대체 누가 너를 이곳에 미리 심어두었는가 친구는 그 밤 이후 새벽마다 어디에 쓰려 저 같은 미물을 구했사온지 중..

1분 / 김경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456 밥의 입국 심사 시인 김경미 3부 1분 / 김경미 대형버스가 교정에서 한 여학생을 순식간에 쓰러 뜨렸다 한 여학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서관 앞 비명 소리가 대형버스보다 더 컸다 버스가 섰지만 이미 늦었다 늦은 건 1분보다 길었을 수도 있지만 1분보다 짧았을 수도 있다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 점심이 귀찮아서 서가 사이에서 몰래 초콜릿을 먹었다 긴 여행을 위해 열흘치 일을 앞당겨 해주고 돌아와 개명 신청으로 새사람이 될 생각이었다 스물두 살이거나 스물셋, 1분 전까지 거기 있었던 여학생 집으로 전화가 갔겠지 따님이 목숨을 잃었어요라고는 차마 말하지 않았겠지 딸의 엄마는 아버지는 더 오래 살았겠지만 시간과 목숨을 이해할 수 있을까 1분 만에 갑자기 영영 사라져버리는 시..

누가 꽃을 / 김경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456 밥의 입국 심사 시인 김경미 3부 누가 꽃을 / 김경미 꽃은 누가 제일 많이 생각해주나 줄무늬 티셔츠의 꿀벌인가 물 주러 오는 비의 발소리인가 해마다 다시 손 내미는 잎들인가 너무 큰 식욕이 고민인 흙과 파라솔 색깔의 햇빛들 우박과 천둥과 벼락도 있지 그들도 다 생각해서 그 큰 몸집을 끌고 기어이 찾아오겠지만 노심초사 언제고 손바닥을 받쳐 들고 여린 귓밥 파줄 듯 무릎에서 접시에서 의자 디딤돌까지 하인까지 다 떠맡는 내내 한결같이 곁에 붙어 있는 제때, 혹은 늦은, 식의 이름들 일인다역의 꽃받침들! page 146~147 2019年 04月10日(水曜日) 3정 / 버들피리

당신의 순간 / 김경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456 밥의 입국 심사 시인 김경미 3부 그곳에서 보다 / 김경미 돈을 아껴 제일 싼 맥주를 샀는데 비린 풀냄새가 났다 병에는 약초 어쩌구 써 있었다 약을 먼저 먹으니 그 약을 필요로 한 탈이 나중에 왔다 저녁의 공원 풀밭 토끼 한 마리가 동양 여자의 눈물을 구경하느라고 코앞을 떠나질 않았다 반팔 옷과 털코트 입은 이웃들이 서로 손을 흔들며 동시에 날씨 얘기를 했다 여름옷과 겨울옷 몇 벌을 들고 중고옷가게엘 갔다 다음 날 그 옷들 나란히 진열되었다 다시 입고 싶었다 아프리카 출신 흑인 남편을 보러 오스트리아인 백인 아내가 왔다 남편은 시인 아내는 번역가 아내의 여성 시인들을 조금씩 흘겨보다가 먼저 떠나는 날 단체 작별 메일을 보냈다 "오늘 당장 남편도 트렁크에 넣..

중년 / 김경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456 밥의 입국 심사 시인 김경미 3부 중년 / 김경미 찢어진 백화점 쇼핑백 속 흙덩이를 두 손으로 안아 들고 고향 동창회에서 돌아왔다 몇 시간 기차에 흔들리던 흙 포대기 밖으로 색색의 채송화들이 불안스럽게 고개를 내민다 며칠 전 베란다 빨래 걷다 무심코 어린 시절 꽃 그립다 말한 아내, 호리병에서 솟아 나오는 백화점 한 채 본다 갖고 싶은 거 다 가지라고 손톱만 한 채송화들 중년의 품에서 뛰어나오는 걸 본다 어느 날 입 벌려보라고는 아내가 물고 있던 껌 얼른 집어가 우물대던 더러운 중년. page143 2019年 04月09日(火曜日) 눈먼 사랑 / 유상록

모래, 낙타를 짜다 / 김경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456 밥의 입국 심사 시인 김경미 3부 모래, 낙타를 짜다 / 김경미 초겨울 비오는 점집 그 옆 야채가게 부서진 의자위에 새끼고양이 한 마리 아슬아슬하게 웅크려잔다 그 몸 위에 술꾼 아저씨 비틀대 며 커다란 배춧잎 한 장 주워다 가만히 덮어준다 page 142 0

당신의 순간 / 김경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456 밥의 입국 심사 시인 김경미 3부 당신의 순간 / 김경미 --마크 로스코 당신이 여기 있는 줄 몰랐다 세 번이나 뒤돌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나사 같은 허공을 급히 뛰다 추락할 뻔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은 목숨을 끊었다 내가 진작 잘했어야 했다 뚝뚝 흘리는 눈물을 보다 못한 경비원이 자리를 피해주었다 --몰래 당신의 피에 손을 넣어본다 내 입에 흘러 넣어주던 당신의 피가 아직 따뜻하다 목숨한테 잘하는 법을 몰랐다 시늉뿐임을 알자 당신은 끝내 떠났다 지금이라도 액자 속으로 넘어가 뒤꿈치라도 잡아야 한다 참다 못한 경비원이 나를 떼어 거리로 집어던졌다 다음 날 또 간다 당신이 멀리 옮겨갔다고 늦게라도 잘하려는데 거짓말로 당신을 빼돌리려 한다 하지만.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