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있는 그대로가 좋아

소리의 거처 時 / 조용미 비 오는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다 숲의 벚나무 가지들이 검게 변한다 숲 속의 모든 빛은 벚나무 껍질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흑탄처럼 검어진 우람한 벛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은 밀히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른 연못에 물이 들어차고 연못에 벚나무와 느티 나무의 검은 가지와 잎과 흐린 하는 몇 쪽과 빗방울 들이 만드는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 가득하다 계류의 물소리는 숲을 내려가는 돌다리 위에서 어느 순간 가장 밝아지다가 뚝 떨어지며 이내 캄캄해진다 현통사霽月 堂의月자가 옆으로, 누워 있다 계곡 물 소리에 쓸린 것인지 물 흐르는 방향으로 올려 붙은 달, 물에 비친 달도 현통사 옆에선 떠내려갈 듯하다 비 오는 날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..

가을밤 時 / 조용미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 가 지나도록 깜박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 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 이 변했겠다 마늘에 綠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 유리병에 둘러싸여 마늘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 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 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줄 마늘 꿀절임 같은 당신을,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 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 2017年01月19日,木曜日 당신도 울고있네요 / 김종찬

장대비 /조용미 오래된 쇠못의 붉은 옷이 얼룩진다 시든 꽃대의 목덜미에 생채기를 내며 긴 손톱이 지나가는 자국 아픈 몸마다 팅팅 내리꽂히는 녹슨 쇠못들 떨어지는 소리 하얀 마당에 푹 푹 단내를 내며 쏟아지는 녹물들 붉은 빗금을 그으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닭벼슬! 맨드라미! 백일홍! 해당화! 엉겅퀴! 큰바늘꽃붉은잎! 신음소리를 내며 막 벌어지는 상처의 입들,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며 나쁜 피를 다 쏟아내는 저녁 강영호 - 사랑할 수 없는 그대

가시연 / 조용미 태풍이 지나가고 가시연은 제 어미의 몸인 커다란 잎의 살을 뚫고 물속에서 솟아오른다 핵처럼 단단한 성게같은 가시봉오리를 쩍 가르고 흑자줏빛 혓바닥을 천천히 내민다 저 끔직한 식물성을, 꽃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꽃인 듯한 가시연의 가시를 다 뽑아버리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나는 오래 방죽을 서성거린다 붉은 잎맥으로 흐르는 짐승의 피를 다 받아 마시고 나서야 꽃은 비명처럼 피어난다 못 가장자리의 방죽이 서서히 허물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금이 가고 있는 소리를 저 혼자 듣고 있는 가시연의 흑자줏빛 혓바닥들 김문규 - 여백

양귀비 / 조용미 불씨가 하얗게 숨을 쉬고 있는, 아직 불이 나지 않은 집 이제 막 불이 붙으려 하는 집 창 틈으로 내다보이는 흰 양귀비가 가득 숨쉬고 있는 마당 단 하루만 타올랐다 꺼지는 불 양귀비, 빛을 내뿜고 있는 아편꽃이 피어 있는 마당 안으로 누가 걸어들어왔다 불이 붙기 시작하고 있는 적요한 마당 안의 흰 양귀비 아래 너울거리는 붉은 꽃들 단 하루의 양귀비, 양귀비 활활 빛을 내뿜고 있는 흰 꽃에 바쳐지는, 불타고 있는 빈 집 비누방울 / 조용미 비누방울을 날린다 크고 작은 것들, 아이는 비누방울을 날리기 위해 태어난 듯 온 정신이 거기에 다 팔려 있다. 담장을 넘어 옆집으로, 지붕 위로, 나뭇가지 위로 골목으로....... 날아가다 그것은 꺼진다. 아이 눈에 꺼지는 비누방울은 없다 허망을 바라..